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

고거전 숙흥양규 팬픽입니다. 알오버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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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의 포스트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12)

칼을 든 강도가 들이닥쳐도 집안싸움을 멈출 줄 모르는 이들처럼 통주의 백성들은 거란주의 자식을 낳은 도순검사와 거란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를 욕하기 바빴다. 전란의 와중에도.

전투가 끝나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고, 그것은 곧 내가 누군가의 숨을 내 손으로 거두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양규는 코끝에 맴도는 혈향을 가만히 좇아가보았다. 혈향의 끝에는 항상 녹슨 쇠냄새가 났고, 그 뒤에는 타다 남은 불티의 타는 냄새와 서서히 굳어지고 부패하기 시작한 시신의 악취가...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12)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11)

이것이 무모한 일임을 어찌 모를까. 그러나 세상에는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행하여야 할 때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성 안의 병력 12500명 중 성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흥화진 벌판에 주둔 중인 거란군을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정성이 아연실색하며 말릴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정성은 최소 6, 7만 정도는 되는 거란군을 12500명을 데리고 탁 트인 벌판에서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며 양규를 말렸고, 양규는 그런 정성의 만류에 성아, 하고 다정스레 그의 이...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11)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10)

전장에서는 모든 것이 핏빛이었다. 핏빛 하늘. 핏빛 노을. 그리고 핏빛 숨결과, 그 숨결 끝에 맺히는 단말마의 비명과 창자 속에서 끓는 듯한 피울음까지. 모든 것이 핏빛이었다.

악몽이 잦아들고 양규는 흥화진의 성벽으로 돌아갔다. 양규는 매일을 흥화진 성벽을 오가며 순시를 돌았고, 때로는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가 저 멀리 보이는 거란 땅을 노려보며 압록강까지 순시를 다녀왔다. 바람처럼 빨리 달리는 말이라 하여 풍이라 이름 붙인 작은 갈색 말을 타고 순시를 돌 때면 양규는 오늬에 효시를 끼운 채로 누구보다 앞장서 말을 달렸고, 그런...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10)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9)

제 어머니를 보고도 아이는 다가올 줄 몰랐다. 그저 멀찍이 서서 목을 움츠리다 정성에게 안겨들 뿐. 양규도 그런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

양규의 악몽이 잦아들기까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양규는 일 년이라는 시간을 매일 밤 숙흥의 품에 안겨 겨우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면 이곳이 상경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를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이 제 정인 김숙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아이는 강보에서 벗어나 걷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젖을 떼고 쌀미음 같...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9)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8)

아이는 흥화진 군병들의 등에 업혀 잠이 들었다. 밤새 찬서리가 내리고 살을 에이는 바람이 불어 아이의 뺨과 손등이 트는 것을 양규는 애써 모른 채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온전히 숙흥의 몫이 되었다.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아본 양규는 아이의 회갈색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치우라고 소리를 질렀고, 아이를 죽이기 전에 치워버리라는 양규의 절규에 숙흥은 아이를 산파에게 안겨 밖으로 내보내게 하고 양규를 품에 꼭 끌어안아 다독여주었다. 괜찮습니다, 형님. 괜찮아요. 저 애는 거란주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이고, 이 ...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8)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7)

네가 자랄수록 악몽은 점점 밀려들었다. 상경성에서의 시간들은 고여 있는 채로 흘러가지 않았고, 그 시간들 위로 낮별을 품은 너의 회갈색 눈동자가 똑, 하고 떨어졌다.

태중에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양규의 악몽은 점점 깊어졌다. 양규는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홀로 마음을 앓았고, 이따금 눈을 감으면 상경성에 와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양규는 온갖 사치품으로 가득 차있는 후궁전의 그 방에 앉아있었고, 황제는 그런 양규의 앞에 다정한 표정으로 나타나 양규가 목에 건 옥가락지를 빼앗아갔다. 양규는 옥가락지를 돌려달라 하였으...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7)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6)

그리운 고려였다. 꿈에서도 그리던 고려였고, 그토록 그리던 흥화진이었다. 그리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 곁에서 죽고자 했던 제 정인이, 흥화진의 미친 호랑이 김숙흥이 곁에 있었다.

돌아온 숙흥을 정성은 몽둥이찜질로 다스렸다. 한 번 더 군령을 어기면 그때는 목을 벨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은 정성은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숙흥을 양규의 곁으로 보내주었다. 흥화진에 돌아온 직후부터 양규는 줄곧 잠이 들어 깨어날 줄을 몰랐고, 숙흥은 그런 양규의 침상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연신 이불을 여며주고 이마...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6)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5)

눈을 감으면 흥화진에서의 지난 날들이 떠오르고, 너와의 나날들이 떠올랐다. 잠이 들면 너를 다시 만나는 꿈을 꾸었다. 한데, 지금 네가 내 앞에 있으니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이냐

상경성을 벗어나고부터 국경을 향해 가는 동안 양규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별과 달을 길잡이 삼아 걸음을 재촉했다. 양규는 황제가 자신을 잡아들이기 위해 추격대를 보냈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서둘러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식을 먹는 시간도 아끼려 건포를 사서 걷는 내내 씹으며 걸었다. 입덧 때문인지 건포를 입에 넣는 순간부터 속에서 신물이 올라...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5)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4)

마음만은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상경성으로 향했다. 당신이 부디 살아있기를, 어떤 모습이든 좋으니 살아만 있어주기를, 살아서 나를 기다려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숙흥이 정신을 차린 것은 애전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한 달하고도 보름이나 더 지나서였다. 정성이 처음 발견한 숙흥은 온몸에 화살이 박히고 양손은 모두 부러진 채로 벌게진 눈자위를 하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무언가를 지키려 하고 있었고, 숙흥에게 다가간 병사들이 하나둘씩 손이나 귀를 물어뜯기고서야 정성은 숙흥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숙흥아, 나다. 흥화진사 ...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4)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3)

옥가락지를 받은 날부터 너와 함께 하는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좋은 세상이 오면 그때는 너와 함께 유유자적 살다 너를 닮은 아이도 한둘쯤 낳고 싶었다.

얼마 전부터 양규는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바람만 일렁여도 졸음이 온다는 계절도 아니건만 양규는 해가 중천에 뜨고도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고, 때로는 시비들의 도움을 받아 세안을 하거나 목욕을 하다가도 잠이 들어 시비들이 주무시면 안 된다며 어깨를 흔들어 깨워야 했다. 양규는 황제의 술시중을 들거나 차시중을 들다 말고도 잠이 드는 횟수가 많아...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3)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2)

살아야지. 이 모진 목숨 어떻게든 살아야지. 살아서 너를 다시 만나고, 죽더라도 너의 곁에서 죽어야지. 거란주의 곁에서 치욕을 견디며 버티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었다.

양규가 죽을 결심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양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했으며, 눈에 보이는 장식품이며 식기들을 눈으로 훑으며 어떻게 하면 이것을 가지고 죽을 수 있을지를 머릿속에 그려보고는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결심은 물건에 손이 가닿기도 전에 사라지고는 하였는데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죽으면 귀한 분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황제의...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2)

하늘 끝에 이르는 바람(1)

차라리 죽이라던 발악과는 달리 살고 싶었다. 수많은 백성들을 내 손으로 쏴죽인 나이건만, 그토록 증오하던 존재의 노리개가 되고도 살고 싶었다. 살아서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압록강과 가까운 서북면도 겨울이 일찍 찾아오건만 거란의 수도가 있는 이곳 상경성은 한층 더하였다. 한때 발해의 옛 수도였던 이곳은 시라무렌이라 불리는 강의 근처에 있었고, 사르허, 사르수 등으로 불리는 이곳의 강물은 서북면의 강물보다 몇 배는 차가워 목욕물을 데우려면 서북면에서보다 더 많은 땔나무를 필요로 하였다. 씻을 물을 데우고 의란향이며 여러 꽃향이 ...